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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카동양도자미술관(大阪東洋陶磁美術館)

일본에서 느끼는 한국 도자의 美

 오사카의 도심부 나까노시마(中之島)공원에 같이 어울러 있는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大阪市立東洋陶磁美術館)은 동양도자 컬렉션으로 세계 제일로 평가 받고 있습니다. 스미모토그룹의 기증과 이승만 정부 때의 외교관 이였던 이병창 박사의 기증품이 더해져 한국도자기가 1100여점에 이르며 미술관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작품이 400여점, 세계적으로도 널리 알려있는「아타카(安宅)컬렉션」, 한국도자로 구성된「이병창컬렉션」등 한국, 일본, 중국의 도자를 다채롭고 깊이 있게 감상할 수 있는 곳 입니다. 또한 한국에서도 볼 수 없는 귀한 도자기들을 한 자리에서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합나다.

 상상원정대에게는 한국의 명품도자기들을 볼 수 있는「이병창컬렉션」과 A,B,C관 한국도자실에서 자유로운 관람(사진촬영허가)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 일본에서 볼 수 있는 한국명품도자의 美를 담아올 수 있었습니다.

응답하라1945가 감상하고 온 스토리 있는 도자기 '달 항아리'와 한국 도자실, 그리고 재일교포 이병창박사의 기증기념으로 만들어진「이병창컬렉션」에서 느낀 한국도자의 아름다움과 고려청자, 조선 분청자와 백자의 우수함 에 대하여 설명해보고자 합니다.

오사카 동양도자미술관 관장님의 박물관 소개 및 인사 동영상

1. 한국과 일본의 합작 '달 항아리'.

 

 둥글고 큰 모양의 백자 호(白磁 壺)로 그 모양과 투명한 빛이 보름달 같다고 해서 '달 항아리'라고도 불립니다.

약 지름 50cm , 높이 50cm 크기의 커다란 달 항아리는 큰 항아리를 단번에 만들 수 있는 기술이 없었던 그 당시 사발 두 개를 이어서 만들었다고 합니다.

세계에서도 10여점 밖에 안 되는 희소성을 가지고 있는 보물입니다.

상상원정대에게도 많은 관심과 주목을 받은 달 항아리에게는 사연이 있습니다.

 

유홍준의 국보순례 (54) '東大寺의 달 항아리' 중에서

 

 달 항아리는 원래 나라(奈良) 도다이지(東大寺) 관음원(觀音院)의 주지였던 가이운(海雲)이라는 스님이 소장하고 있던 것 이다. 이 스님은 항아리를 좋아하여 '항아리 법사(壺法師)'라는 별명을 갖고 있었는데 그는 관음원 응접실 가장 좋은 자리를 항상 조선백자 달 항아리로 장식했다.

소설가인 시가 나오야(志賀直哉)가 2차세계대전 직후 이 절에 와서 잠시 신세를 지고 돌아간 다음 스님에게 감사의 뜻으로 보내 준 선물이었다.

스님께서 돌아가신 뒤에도 관음원의 응접실에는 언제나 이 달 항아리가 그대로 놓여 있었다. 그러던 1995년 7월 4일 대낮에 한 남자가 침입하여 이 항아리를 들고 도주했다. 이때 경비원들이 뒤쫓아 가자 그는 항아리를 땅바닥에 내동댕이치고 달아났다. 그 바람에 이 항아리는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셀 수 있는 파편만 300여 조각이었다. 경찰 조사 후 관음원은 고고학자의 도움을 받아 깨진 파편을 작은 가루까지 쓸어 담아 동양도자미술관에 기증하였다.

미술관 측은 2년간 파편 조각을 맞춰 본 다음 복원하기로 결정하고 도자기 복원기술자에게 맡겼다. 6개월 뒤 복원기술자는 일차 작업을 마친 것이라며 박물관 관계자들에게 조각조각 이어 붙인 항아리를 보여 주었는데 거짓말처럼 완벽한 복원에 모두들 놀랐다고 한다. 손때가 묻었던 자국까지 원래 모습 그대로였던 것이다. 앞으로 미세하게 남아 있는 이음 자국마저 말끔히 없애는 작업이 남아 있다고 했다. 그러나 미술관 측은 이 흔적을 그대로 남겨 놓기로 했다.

육안으로는 잘 보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 항아리의 역사를 위해서 남겨 두기로 한 것이다. 이후 이 항아리는 미술품 복원의 기적이라는 칭송과 함께 더욱 인구에 회자되는 전설적인 조선백자 달 항아리로 되었다.

 조선의 소박함과 단정함이 담겨있는 백자항아리의 아름다움을 완벽하게 복원시킨 일본의 복원기술이 있었기에 보름달 같은 환한 순백색으로 우리를 감동시킬 수 있게 되었습니다. 둥글다는 보다는 둥그스름하다는 표현이 완벽하게 맞아 떨어지는 조선 백자 달 항아리에 대한 감동의 여운이 아직도 가시지 않습니다.

조선 17세기 백자 호 일명 '달 항아리'.

2. A관 한국도자실 (고려시대)

 

 고려시대의 도자기하면 청자가 대표적이고 청자하면 고려청자가 으뜸으로 꼽힙니다. 세계에서도 인정받는 고려청자에 대해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청자는 점토로 기물을 만들고 700~800℃에서 구워낸 후 그 위에 다시 철분이 1~3% 가량 들어 있는 장석질의 유약을 입혀 1200℃ 내외의 고온에서 구워낸 자기입니다. 청자를 만들기 위한 기술적 요건으로는 1000℃이상의 온도에서 구워 낼 수 있어야 하며, 높은 온도에서 녹는 잿물유약을 능숙하게 사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당시 1000℃이상의 온도를 올려서 도자기를 구워내는 기술과 유약을 고르게 바를 수 있는 기술이 있다는 것은 우리 민족의 도자기술의 수준이 상당히 높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당시 서양이나 일본보다 앞서 이루어낸 중국과 한국의 첨단기술이었습니다.

청자의 시작은 고려 초 불교의 도입과 귀족들의 차(茶)문화로 고려에 중국의 월주요청자의 기술을 도입하여 중국의 청자기술을 토대로 만들어지기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고려시대 12세기에 들어서면 중국에서도 청자하면 고려청자라는 말이 나올 만큼 우리의 것으로 흡수하여 고려만의 美로 청자를 만들게 됩니다.

 

 송나라 태평노인 <수중금>에 보면

 

“건주의 차, 촉 지방의 비단, 정요백자, 절강의 차, 고려비색 모두 천하의 제일인데, 다른 곳에서는 따라 하고자 해도 도저히 할 수 없는 것들이다.”

 

이는 백자의 경우 정요제품을 제일로 여기면서도 청자에 관해서는 고려비색이 제일임을 인정하는 찬사입니다.

거의 모든 물품에서 중국의 것이 최고라고 말하지만 고려의 비색을 손에 꼽을 만큼 우리의 청자가 높은 값어치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1123년 인종 1년 송나라 사신 서긍의 <고려도경>에는 고려의 독창성을 알 수 있는 글이 있습니다.

 

“고려 사람들은 도기 가운데 푸른 빛을 띠는 것을 비색(翡色)이라 한다.”

 

당시 중국인들이 그들의 청자를 비색(秘色)이라고 불렀던 것과 달리 고려인들은 청자를 물총새 비(翡)자를 사용하여 중국의 것과 구별하고 있습니다.

 

 우리만의 색깔이라는 것과 중국의 청자와 차별화를 두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글입니다.

12세기 청자의 절정기에 청자를 만드는 다양한 기술이 계발되었는데 그 중 하이라이트는 상감기법으로 청자의 대표작품인 청자상감운학병을 만들어 낸 기술입니다. 장인의 손기술을 요하는 정밀함과 섬세함을 요합니다. 특히 상감청자를 만드는 단계 중 마지막 도자기 깨트리기는 완성 된 도자기에 조금이라도 결함이나 있을 시에 깨트려 없애버리는 것으로 몇 개월간의 땀과 노력을 아까워하지 않고 과감히 없애고 다시 만드는 장인정신이 담겨있는 과정입니다.

이러한 장인정신을 실천했기에 고려청자를 청자 중 세계제일로 만들 수 있었습니다.

좌)청자상형 동녀형 연적(靑磁彫刻 童女形水滴),  우)청자상형 동자형 연적(靑磁彫刻 童子形水滴)

 

 이규보 시인의 시가 생각나는 청자 연적입니다. 청자연적은 당시 고려 청자가 생활전반에 기와와 연적 등으로 이용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좌)청자 과형병(靑磁 瓜形甁),          우)청자운학병 상감기법 사용  

 

 참외모양을 묘사한 병으로 중국 과형병과 비슷하며 비교했을 때 고려의 비례미를 볼 수 있습니다.

3. B관 한국도자실 (조선시대.분청사기)

 

 고려 무신집권 이후 폐단이 쌓이더니 몽골의 침입 국력이 소모되면서 제작상의 통제와 집중력이 약화 청자의 문양은 긴장감을 잃게 되고 공교함과 번조기술이 해이해집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일반 대중을 위해 대량 생산, 새로운 면모로 탈바꿈하여 고려 말의 타락한 청자는 조선왕조로 넘어와 조선전기 분청사기로 이행됩니다.

분청사기는 회색과 회백색 태토(胎土)위에 표면을 백토로 분장한 뒤 유약을 입혀 환원번조로 구운 도자기 입니다.

청자와 비슷하나 좀 더 흑회색을 띈다는 점에서 색깔에 차이가 있고 청자에 비하여 황색을 띤 투명한 백색 유약을 입혔습니다. 

분청사기만의 특징은 무엇보다도 백토 분장기법에서 보이는데 백토의 분장기법은 중국에 북송대(北宋代)에 걸쳐 자주요(磁州窯)일대에서 유행했으며 귀족들과 나라에서 사용하는 용도보다는 민간에서 사용되는 용기로 생산될 때 쓰였습니다.

 

 분장기법은 무늬를 나타내는 수단이기도 하며, 그릇 표면을 백토로 씌워 백자로 이행되는 과정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와 함께 다양한 기법이 고안되어 율동감 있는 분청사기의 美를 나타내게 되었습니다. 분청사기의 무늬는 활달하고 민예적인 것이 특색 입니다. 무늬로는 모란·모란잎·모란당초·연화·버들·국화·당초·인동·파초·물고기·어룡(魚龍)·화조무늬 등이 주로 시문되었으며, 그 밖에 나비·매화·빗방울·여의두(如意頭)·돌림무늬(雷文)등 추상적인 변형, 무늬의 재구성은 조선시대 도공들의 예술적인 탁월성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4. C관 한국도자실 (조선시대. 백자)

 

 분청사기에 이어져 만들어진 백자는 백토(白土)로 형태에 무색 투명의 유약을 입혀 1,300℃ 에서 환원번조로 구워 낸 자기로 단정한 모형과 순백색이며 중국과 한국에서 서양과 일본이 만들기 1000년 전부터 만들어낸 도자기입니다.

 조선 백자는 후기로 내려올수록 다양한 기형과 문양이 만들어지고 후기 후반경에는 화사한 국면을 연출합니다. 그러나 기형과 문양에 지나친 기교를 부리거나 실용에서 벗어난 예는 거의 없었습니다. 19세기 사회 일각에서는 순백자만을 지향하지 말고 보다 적극적으로 기술을 도입하여 다양하고 화려한 문양이 있는 백자도 생산하여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기 때문에 이러한 시각이 점차 확산되고 다종다양한 기종과 문양이 후기에 등장할 수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순백자에 대한 선호는 끝까지 우리 마음에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헌종때 학자 이규경(李圭景) 저서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

 

“우리나라 자기는 결백한 데에 그 장점이 있다. 여기 그림을 그리면 오히려 이에 미치지 못한다.”

 

조선백자는 기능미를 살려서 간결 소탈하고 단정 정직하며 그 속에 유머와 해학이 있다.

언제나 자연스럽고 어딘가 익살스러우며 단순 간결한 美가 있습니다.

 일본은 임진왜란을‘도자기전쟁’또는‘다완전쟁(茶碗戰爭)이라고도 부릅니다. 그 이유는 일본보다 선진문화국인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선진기술인‘도자기’에 대한 오랜 선망과 이를 가지고 싶은 욕망이 우리나라를 침략하게 된 원인 중의 하나였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우리의 수많은 사기장인(沙器匠人)이 일본으로 끌려가 일본이 비로소 자기를 만들 수 있게 되고 도자기산업이 획기적인 발전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뒤 일본의 도자기산업은 세계를 지향하여 큰 비약을 하게 되고 지금 세계 도자기산업의 최첨단을 걷게 되었습니다. 

철사백자 호록문 호(鐵砂 虎鹿文 壺)

 

반대편 사슴을 쫓는 호랑이, 해학적인 요소가 들어있습니다.

5. 이병창 컬렉션

 

 평생 모은 301점의 한국도자기와 중국도자기 50점을 해서 총351점을 기증해 이루어진 컬렉션과 동경의 집과 부동산을 처분한 연구기금이 1999년 한국이 아닌 일본에 기증된 것을 알고 많은 사람들이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저도 '왜 그토록 사랑하는 고국에 남기지 않은 것일까?'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이병창 박사님에게는 소장품을 두고 사건이 있었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그분이 아끼던 고가의 백자를 한 점 기증하며 "온도, 습도를 맞춰 전시해 줄 것"을 바랐지만 당시 박물관에서는 '그만한 요구조건에 맞출 설비가 없다'고 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내가 돈을 내어 그런 전시실을 짓겠다.' 했는데도 거절을 당했다고 합니다. 결국 재일 한국인들이 많이 사는 곳이자 한국도자를 수집한 아타카컬렉션이 있는 오사카시립 동양도자미술관에 기증되게 된 것 입니다. 그렇게 되기까지는 이병창이 펴낸 책 <한국미술수선>의 편집자이며 안택산업에서 미술품관리자로 일했고 현 오사카 동양도자미술관장인 이또 씨의 역할이 컸습니다. 한국의 유물보존 상황에 확신을 줄 수 있는 유능하고 좋은 전문가가 그를 설득할 수 있었다면 사정은 달라졌을지도 모릅니다.

 

 "오사카동양도자미술관에 수장된 아다까 씨의 한국도자 793점에 제가 모집한 301점의 한국도자와 50점의 중국도자를 합치면 5천 년에 걸친 민족문화의 흐름을 통시할 수 있고 관련된 도자연구가 한층 심화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저의 모집품과 미술의 조사활동, 자료구입, 연구, 출판 등의 기금으로 제가 소유하고 있는 동경의 토지와 건물을 기증키로 했습니다.

이 기금이 한일문화교류, 친선과 발전에 유익한 도움이 될 것을 기원합니다. 신관 1층에 이병창기념 도자자료실과 한국도자전시실을 설치하여 개방하고 있습니다. 적극 이용하시어 훌륭한 연구논문이 학회에 끊임없이 소개되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습니다.

고국을 떠나 살고 있는 한국인 2, 3세 여러분도, 긴 전통과 풍요로운 역사, 문화의 모국을 자랑으로 용기를 가지고 밝은 신세기를 맞이해 주시기 바랍니다. 단기 4332년 이병창" -1999년 발간된 <우아한 색·순박한 형태- 이병창 컬렉션 한국도자의 미>의 서문-

 

 이를 보면 '일본에서 사는 재일교포들의 자존심을 드높이기 위한 방편이라고 처음부터 말하고 있습니다. 이병창 박사님이 가지고 있던 귀한 도자기들을 가장 적절한 온도와 습도에서 보존하고 전시할 수 있는 시설로 선택한 곳이 일본이었다는 것에 참으로 부끄럽고, 죄송스러운 마음이었습니다.

 그저 '왜 한국이 아닐까?'만 떠올렸던 짧은 생각들이 부끄럽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 박사님의 문화재에 대한 소중한 마음과 조국에 대한 사랑이 선택한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에서 보물들이 보관되고 있었기에 지금까지 고운 자태로 우리를 기다리고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왼쪽부터 이병창, 미와, 최태영. 1988년 후지미야시다문서에 대한 논의차 동경에 모인 세사람 뒤로 골동품이 장식된 이병창연구실의 실내가 조금 보인다. ⓒ최태영

네이버신문 한겨례 1999년 1월 23일자.

참고자료 :

「고려시대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2편」- 푸른 옥에 핀 꽃, 고려청자

「한국민족대백과사전」-분청사기, 조선백자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 언론인-김유경

 

원문 포스팅:

http://z_cerise.blog.me/40205612302

동양도자미술관의 전경

Flickr로 접속되는 링크입니다. 이곳에서는 동양도자미술관에 전시되어있는 작품들을 더 큰 해상도와 다양한 종류로 보실 수 있습니다.

© 2014 by Pride of Korea 응답하라 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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