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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류지(法隆寺)

아스카 문화의 산실. 그러나 인정하지 않는 진실

한국건축답사수첩/한국건축역사학회/동녁출판사/2008년/P.455

부여 정림사지 5층 석탑/2012년 촬영

호류지 5층 목탑/2014년 촬영

 호류지는 아스카 시대(6세기 중엽~8세기 초)의 모습을 오늘날에 전해주는 사찰로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 창건 유래는 「금당」의 동쪽 법당에 안치되어 있는 「약사여래상」의 후광명 및 『법륭사절 가람연기 및 유기자재장』(747)의 유래문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그 유래문에 의하면 요메이 천황이 자신의 병을 치유하기 위하여 절과 불상을 건립하도록 명하였으나 그 완공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고 전해오고 있습니다. 후일 스이코 천황과 쇼토쿠 태자가 요메이 천황의 유언을 받들어 607년에 절과 그 본존 「약사여래상」을 건립하였던 것이 이 법륭사 절이라고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또한 일본 정사의 하나인 『일본서기』에는 670년(천지 9년) 4월 30일 밤에 법륭사 사찰이 완전히 소실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기록을 두고 메이지 시대 이래 법륭사의 재건 여부를 둘러싼 논쟁이 전개되어 오고 있고 오늘날에도 현재의 가람 건립 연대에 관해서는 많은 문제점을 남기고 있다고 합니다.

 

 여기까지가 일본 호류지에서 나누어준 팜플렛에 적혀있는 내용입니다. 하지만 이 내용이 전부는 아닙니다.

 

 백제는 538년부터 일본에 불교를 전파했습니다. 백제는 삼국간의 치열한 경쟁에서 일본을 끌어들여 친밀한 관계를 맺을 필요가 있었고, 일본의 야마토 조정은 고대국가 체제를 구축하는데 그 이념으로 불교를 필요했었습니다.

안녕하세요. 응답하라 1945의 팀장 천승환입니다.

 

 제가 이번에 소개해 드릴 곳은 호류지입니다. 어떤 콘텐츠로 다가갈까 고민을 하다가 다양한 자료와 쉬운 설명이 필요 할 것 같아서 호류지에 대한 설명과 호류지의 자랑 호류지 5층 목탑을 통해서 만난 백제문화에 대한 설명, 그리고 담징의 금당벽화, 백제 관음상에 대한 내용으로 구성을 해 보았습니다. 우선 호류지에 대한 설명 먼저 들어보시죠.

 

 607년에 백제는 백제의 기술자를 총동원하여 나라지역에 법륭사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창건법륭사는 670년에 불타버렸고, 680년이나 690년경에 통일신라는 다시 대규모 기술자를 파견하여 법륭사를 재건하였습니다. 그래서 지금의 법륭사는 창건 법륭사가 아니고 재건 법륭사라고도 합니다.

 

 창건 법륭사를 일본에서는 약초가람(若草伽藍 와카쿠사가람)이라 부르는데, 법륭사 남대문 바로 오른쪽 공간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발굴한 창건법륭사의 가람은 1탑 1금당 양식인데, 우리나라 삼국시대의 대표적인 가람배치와 같습니다. 부여 정림사터의 배치와도 같은 모습으로 이 사실을 통하여 창건 법륭사가 백제의 영향을 받아 건축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 호류지란?

2. 호류지 5층 목탑과 정림사지 5층 석탑

 일본의 자랑. 호류지의 자랑. 세계 현존하는 최고의 목탑 호류지 5층 목탑이 백제 부여의 정림사지 5층 석탑과 비슷한 모습을 가지고 있다면 믿으시겠습니까?

 두 탑의 공통점은 탑의 높이에 비해 기단의 길이가 낮으며, 층간의 옥개석의 크기가 일정하다는 점. 이것이 두 탑의 공통점입니다. "에이 뭐야 공통점 두 개가지고 비슷하다고 말하기는 조금 억지가 아니야?"라는 생각을 가지실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두 절의 금당에서 한번 우리나라의 문화를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호류지 금당/2014년 촬영

부여 정림사지 금당/2012년 촬영

 우선 정림사지의 금당은 1층으로 되어있고, 호류지의 금당은 2층으로 되어있습니다. 정면이 아니라서 자세히 보실 수는 없겠지만 공포와 하앙식 구조의 모습이 비슷하여 호류지 금당은 백제에서 일본으로 넘어간 아스카문화의 대표적인 예로 많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또한 호류지에서는 2층의 난간에 설치된 卍자와 그 아래에 있는 人자의 형태를 수당 전기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일본의 고대 문화를 한반도보다는 수당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서술하는 것은 일본의 자료에서 흔히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2층에 있는 난간과 비슷한 것이 전라북도 남원에 있는 백장암 3층 석탑에 부조된 모양과 똑 같은 형태를 가지고 있어 주목되기도 합니다. 따라서 목탑에 이러한 난간을 설치하는 것이 이미 우리나라에서도 보편적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쉽게 알 수 있고 또한 이 기술이 그대로 일본에 전해진 것으로 생각됩니다.](출처 : 고등학교 은사님 블로그)

 

 가람배치 양식을 보아도 백제의 양식을 볼 수 있습니다. 부여의 사찰들은 한결같이 1탑 1금당식 가람배치를 보입니다. 그 양식이 확인된 가장 오래된 것은 공주의 대통사입니다. 이를 통해서 호류지는 백제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3. 담징의 금당벽화

 오른쪽의 그림은 고구려의 스님 담징이 그렸다고 전해 내려오는 호류지의 자랑 금당벽화입니다. 이에 대한 기록은 720년에 편찬된 일본 관찬 역사책 《일본서기(日本書紀)》를 보면 담징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려 있습니다.

 

 “스이코(推古) 천황 18년(610) 3월에 고구려왕(영양왕)이 승 담징과 법정(法定)에 바쳐올렸다. 담징은 5경(五經)을 알고 있었다. 그는 그림에 능했으며, 종이와 먹을 만들었고 또한 물레방아 맷돌을 만들었다.” 라는 기록을 통해 호류지 금당 벽화를 담징이 그린 것으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호류지에서 배포하는 자료를 보면 누구의 그림인지 밝히지 않고 있어서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밑에서 네 번째 줄을 보면 "또한 천정에는 서역문화의 영향이 짙은 천인과 봉황새가 비상하는 생동감 넘치는 필치로 그린 닫집이 걸려있으며 주위의 벽면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벽화 (1949년 소실되어 현재에는 패널에 그려진 모조 벽화로 대체되어 있습니다)가 그려져 있어 창건 당시의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 그림은 담징이 그렸다는 것이 명확한 사실인데 기재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런 문제점을 하루빨리 호류지에서 고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4. 백제관음상

 백제관음상은 7세기 초 백제에서 일본 호류지로 전해졌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녹나무로 만들어진 나무 불상이며 원래의 이름은 "허공장보살"이었다가 18세기부터 백제관음상이라고 불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름부터 백제의 것임을 알 수 있는 백제관음상 또한 역사왜곡의 피해자가 되고 있습니다.

출처 : 네이버

 그 어디에도 백제에서 어떻게 전해졌는가에 대한 내용이 없습니다. 또한 한때 이 관음상이 정말로 백제에서 왔는가에 대한 논란까지 있었다고 합니다.

 

일본학자들의 1910년 이후 주장에 따르면 "녹나무는 조선에서 자생하지 않는 식물이다."라고 주장하며 백제관음상의 백제제작설을 부인하고 잇습니다. 하지만 후에 조사결과 한국에도 녹나무가 자생한다고 밝혀져 이러한 일본의 주장을 반발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하루빨리 이러한 잘못된 점들을 바로잡고 아름다운 백제문화의 산실을 순수하게 그 유물의 가치와 올바른 눈으로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약간 전문적인 내용이 들어가 많이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간략하게 정리해서 알려드리려고 합니다. 현재 호류지를 통해서 백제에서 일본으로 전해져 간 아스카문화의 산실을 많이 찾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일본은 아직까지도 그 사실을 부정하고 최대한 인정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이런 일본의 인식이 촉구되어 인정할 것을 깔끔하게 인정하고 귀중한 문화유산을 더욱 가꿀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 2014 by Pride of Korea 응답하라 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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