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미술관(高 麗美術館)
일본 속의 조선문화
고려미술관의 설립자
정조문(鄭詔文, 1918∼1989).
경상북도 예천군 우망리(憂忘里)의 동래 정씨 집안에서 태어났다.
구한국 정부의 관리였던 조부 정건모(鄭建模)는 도쿄에 파견되어 훈장 제조 기술을 익히고 돌아와 훈장 제조국에 근무하였다.
부친 정진국(鄭鎭國)은 가세가 기울자 아내와 아들 둘(둘째인 조문은 당시 6살이었다.)을 데리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형사들이 끊임없이 찾아와 괴롭히는 바람에 식구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조문은 부두 노동자가 되었다. 후에 교토에서 빠찡코점을 차리면서 돈이 모이자 정조문은 일본 권력자들에게 빼앗긴 조국의 문화유산을 되찾는 결심을 굳혔다.
그 꿈이 고려미술관 설립으로 이어진 것이다.
1,680여 점에 이르는 소장 유물들 모두가 일본에서 수집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를 한국인이 세운 미술관이라는 것에 큰 의미가 있다.

재일동포 정조문이 세운 미술관
정조문이 자신의 집터(대지 120평)에 세운 일본 교토시(京都市)에 있는 사립 미술관으로 지하 1층, 지상 3층 규모의 철근 콘크리트 건물(건평 137평)입니다. 소장 유물은 통일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에 걸쳐 계통적으로 모은 도자기류가 주류를 이루며 이들 가운데 백여 점은 매우 뛰어난 명품들입니다. 이 밖에 회화류 70여 점, 불상 및 금속 공예품 20여 점, 구리거울 20여 점이며, 목 공예품과 민속품 50여 점 등은 희귀한 예술품들을 소장하고 있습니다.
유물을 수집하면서 1969년에는 조선문화사(朝鮮文化社)를 설립하고 <일본에 남은 조선문화>라는 계간지를 발행하였고 이 잡지는 1981년 50호를 마지막으로 휴간되었지만 그 끼친 영향은 매우 컸습니다.
교토신문에서도“여러 가지 이화감(異和感)을 지니고 태어난 이 잡지는 고대 조선에서 들어온 인간과 문화를 빼면 (일본에는) 아무 것도 남은 것이 없지 않은가 생각될 만큼 큰 영향을 끼쳤다. 편견에 차 있던 일본 고대사에 이처럼 충격을 준 잡지는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정조문 선생님은 1972년부터 재일 사학자들과 더불어 일본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는 한국 관계 유적을 돌아보는 탐방단을 조직, 큰 성과를 거두었고 한국 문화의 일본 유입 사실을 일본인의 눈으로 확인시키려는 것을 목적으로 조직된 이 모임에 무려 5백여 명이나 몰려들었습니다.
“그들은 역사의 모순을 이야기하였다. 혹은 신들의 유래에 관해 이야기 하곤 했다. 그런데 잡지게재를 위해 글을 의뢰하고, 원고를 받아보면 지금까지의 역사서와 별로 다를 바가 없었다. 오히려 놀라운 일들이 벌어졌다. 일본인의 ‘역사 체질’이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이상한 ‘권위’가 그렇게 시킨 것이다. 그들은 신들의 모습을 생활 속으로 끌어들여 자유롭게 이야기한다. 예를 들면 신들은 원래 인간이었고, 따라서 자신들의 먼 조상이었다고 한다. 거기에서 역사를 보려고 한다. 그러나 역사학자라고 하는 이상한 ‘권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 창간호 원고에서부터 난관이 있었던 것은 당연하다. 생각해보면 열정만으로 발행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창간호 좌담회는 이해를 같이하는 사람뿐만 아니고, 기대하지도 않았던 그 이상의 출석자도 있었다. 우에다 마사아끼, 시바 료타로, 무라이 야스히코, 그리고 김달수였다. 말하자면 미래가 불투명한 잡지에 일본의 유명한 인사가 참가했던 것이다. 행운이었다.”
-정조문 발행의 '일본속의 조선문화' -
고려미술관은 세계 유명 박물관에 한국실이 따로 있지만 고려미술관은 우리 문화유산만을 전시하는 유일한 해외 미술관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큽니다. 그리고 정조문 선생님이 미술관을 세우고 잡지를 내고 연구소를 설립하는 데에 일본의 교토 대학 교수와 저명한 학자들이 적극적으로 도운 점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재일동포 정조문 선생님의 조국애
정조문 선생님의 형 정귀문씨는 당시 일본에서 작가로 활동하고 있었을 당시.
도쿄에서 활동하던 재일작가 김달수, 정귀문, 정조문형제 이렇게 세분이 우리나라의 흔적이 남아있는 곳을 답사하기로 합니다.

유적 답사에 나선 정조문과 형 정귀문, 재일작가 김달수, 재일사학자 이진희, 소설가 시바 료타로는 그렇게 여러 곳을 탐방하다 규수의 아리타(有田)를 답사하게 됩니다. 그 곳의 작은 산에서 ‘도조이삼평비’를 보게 됩니다.
이삼평은 임진왜란 때 일본에 잡혀가 조선 백자 기술을 전파한 도공으로 조선에서는 그저 도공에 불과했던 이삼평이 일본에서는 도자기의 조상으로 불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이 후에 정조문은 조선백자를 수집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외에도 정조문은 고대 한,일 역사를 재조명하고자 책도 편찬합니다. 하지만 일본 학계를 입장도 고려해야 했기 때문에 교토대학의 역사학 교수였던 우에다 마사아끼 교수를 찾아갑니다. (후에 고려미술관의 관장이 됩니다.)
“‘일본 속의 조선문화’에는 광고가 하나도 없다. 단 한 줄도 없다. 물론 타사광고에 실린 적도 없다. 왜냐하면, 광고를 싣게 되면 잡지가 퇴색하게 된다. 북측의 기업 광고가 게재되면 이 잡지는 북측 계통의 읽을거리가 되고, 남측의 기업광고가 실리면 남측의 잡지가 된다. 그리고 일본 기업은 당치도 않은 것이야.”
이렇게 우리 역사와 문화를 일본에서도 지키고자 했던 재일동포 정조문 선생님의 정신은 고려미술관 이름에도 들어있습니다. 고려는 최초의 통일 국가로 우리민족공동체를 말하는 것으로 북과 남으로 나뉜 분단된 조국으로는 가지 않겠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결국 통일되지 못한 고향에 가보지 못하고 돌아가신 정조문 선생님께 애도를 표하며 한국보다는 민족을 생각했던 마음을 생각해봅니다.

참조문헌 : 한국민족대백과
사진출처: 김상수 칼럼 中-‘일본속의 조선문화' 교토(京都)‘고려미술관(高麗美術館)’옮긴 투데이오늘 뉴스.
원문 포스팅 : http://z_cerise.blog.me/40205655284
고려미술관의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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